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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엽 & 일당스님

kk고상 2012. 9. 9. 04:33

 

 

 일엽스님 속명은 김원주(元周) 

(1896.4.28 - 1971.1.28)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의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필명이다.

평안남도 용강 출생. 승려, 시인, 수필가로서 진남포의 삼숭여학교(三崇女學校)와 이화학당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에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여 여성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유연애를 구가하는 한편, '단장(斷腸)',' 애욕(愛慾)을 피하여' 등의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중년에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여승으로서 생애를 마쳤다.

만년에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를 간행하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등의 작품을 남겼다. 

 

 

일당스님( 85세. 일엽스님의 외아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속명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비구니계 거목 '일엽스님'의 외아들 일당스님의 파란만장한 삶 [ 글·박윤희 자유기고가 사진·박해윤 기자] 

“나의 지나온 삶은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시간이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한 80세 노스님이 털어놓은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삶.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해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회한이 서린 말로 어머니를 추억하는 팔십세의 노스님. 우주적인 혜안을 지닌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생모의 부재에서 오는 근원적인 허기는 메울 수 없는 것일까. 지난 7월17일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합장하고 있는 일당스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투명하나 날카롭지 않은 눈빛, 미소를 담고있는 부드러운 눈매와는 또 다른, 어떤 표정이 스님의 뒷모습에 서려있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있는데, 최근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스님이 입적한 지 31년 만의 일이다.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 혹은 김일엽은 연애대장이다 등등 어머니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이 많았어요. 한때는 어머니와 저를 두고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책을 냈어요.” 그렇다면 김일엽은 누구인가. 목사의 딸로 태어나 조실부모한 그의 본래 이름은 김원주.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의 아름다운 문체에 반해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필명이다.

 

출가하기 전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해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동인지 <폐허>의 문학동인으로도 활동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다. 이화학당을 거쳐 도쿄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기도 한데 윤심덕, 나혜석 등과 동시대의 ‘신여성’으로서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신정조론’이라는 글까지 발표해 논란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

 

‘신정조론’을 통해 낡은 관습을 비웃고 자유연애를 외친 김일엽. 그도 알고보면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신정조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당시의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그역시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의족을 한 장애인이란 사실을 숨겼고, 결혼 후에야 이 사실을 안 그는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일찌감치 청산했다.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게 했던 일엽스님

이후 ‘신정조론’을 주장한 이력에 한번의 이혼경력이 보태어져 김일엽은 마치 ‘스캔들 메이커’인 것처럼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스캔들로는 ‘이광수의 애인설’을 꼽을 수 있다. “춘원과 연인사이라는 소문이 왜 났냐 하면 어머니가 의사 허영숙씨(춘원의 두번째 부인)의 부탁으로 춘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했었어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춘원도 어머니의 뛰어난 글솜씨에 무척 놀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은 춘원이 아니라 일본인인 제 아버지였어요.”

김일엽이 관습의 굴레를 벗어던진 후 마지막으로 찾아온 ‘오다 세이조’와의 운명적 사랑. 그러나 정작 그의 운명적 사랑은 관습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에 의해 거부당했다.

 

“1921년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처음 마주쳤어요. 당시 규슈제국대학 법학과 학생이었던 부친은 어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했죠. 그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접니다.” 은행총재를 아버지로 둔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조는 “그녀의 뱃속에는 오다 가문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며 결혼 승낙을 받아내려 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낙태’ 시키라는 고함뿐이었다.

 

이에 오다 세이조는 부모님과 절연을 선언했고, 70년 독일에서 홀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다’ 가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22년 9월, 결국 김일엽은 오다 세이조의 친구집에서 귀여운 사내아이 ‘오다 마사오’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일당스님이다.

 

“어머니는 저를 낳자마자 아버지께 ‘당신하고 살면 내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평생 조국을 배신한 괴로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도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 마사오와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내용의 편지 한장만 남기고 한국으로 가버리셨답니다.” 일엽스님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28년 충남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불자의 길을 걷게된다. “아버지는 한국에라도 와서 어머니와 가까운 곳에 계시려고 총독부에 지원하셨어요. 해방 후에는 일본 외교관으로 일하셨고요. 평생 어머니를 못 잊고 독신으로 사신 분이죠. 저는 아버지 친구 분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우리 세 가족은 단 한번도 같이 살아보지 못했어요.”

 

일엽스님을 시봉했던 경희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일엽스님이 병으로 앓아누워 있을 때 한 노신사가 찾아왔었다고 하는데, 일당스님은 이들 두고 혹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런 추측을 내놓는다. “70대 노신사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병든 어머니 뵙길 청했답니다. 노신사는 방문 앞에서 누워계신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서야 방으로 들어가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앉으셨대요. 그리고 아픈 어머니를 보고 한참 눈물을 흘리시더니 하얀 손수건을 어머니 손등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의 손을 얹으면서 어머니 손을 꼭 잡더랍니다.”

 

일엽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일당스님도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 때문에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래서 일당 스님은 “내가 지나온 삶은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사투’를 벌여온 세월이었다”고 회고한다. “14세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어요. 황해도 신천에서 양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몰래 수덕사로 내려갔죠. 그런데 저를 처음 본 어머니가 그렇게 냉정하실 수가 없었어요. 저는 평생 동안 어머니 품에 단 한번도 안겨보지 못했으니까요.” 어머니를 처음 본 일당스님은 “그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난 그리움이 눈물로 변해서 콸콸 쏟아졌다”고 하는데 대뜸 어머니로부터 예기치 않은 호령이 날아왔다. 울음을 그쳐라! 여기는 산중의 절이다. 너는 절에 왔으니 절 풍속과 예절을 지켜야 한다. 우선 나에게 다시는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스님’이라고 해야 한다. 알겠느냐?” 어머니 품에서 하룻밤 자겠다는 일당스님의 달콤한 기대는 보기 좋게 허물어졌다. 그날 밤 일당스님은 인근 초당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계속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라훌라.’ 부처님도 출가하시기 전에 속세에서 얻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이름이 바로 라훌라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수행에 방해되는 존재를 ‘라훌라’라고 일컫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모자의 연을 잘라낸 어머니에게서 일당스님은 당연히 라훌라이자 애물단지였던 것이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가도 매서운 눈으로 대하셨어요. 절에서 재워주지도 않고 근처에 있는 ‘수덕여관’으로 내쫓으셨죠. 만일 그곳에서 나혜석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분노와 설움을 이기지 못해 아주 많이 비뚤어져버렸을 겁니다.”

 

어머니 가신 길 따라 늦은 나이에 출가

일엽스님의 친구인 화가 나혜석은 이혼 후 집에서 나와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며 수덕사를 찾아왔지만 그곳 만공스님은 ‘스님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혜석과 일당스님은 수덕여관에서 모자처럼 각별한 정을 쌓아가게 되었다. “그림 그려보라고 그림도구를 빌려주시는가 하면 엄마젖을 못 만져 봤으니 내젖을 만져보라며 그분 젖가슴에 내손을 올려 주시고는 했었어요.”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었던 고암 이응로 화백이 자주 찾아와 일당스님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훗날 고암은 많은 추억이 서린 수덕여관 뒤뜰 너럭바위에 ‘문자추상화’를 새겨넣은 암각화를 남겨놓기도 했다.

태생적으로 ‘라훌라’가 되어버린 일당스님의 운명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운수납자’가 따로 없었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구름과 물처럼 흘러간다’는 의미의 운수납자는 보통 스님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의 젊은 시절도 구름이나 물처럼 떠돌이 인생이었다. 그를 키워준 양아버지만 해도 신도 아라키, 송기수, 이당 김은호, 김봉률 스님 등 여러 명이었다. 불려진 이름만 해도 오다 마사오, 송영업, 김설촌 그리고 현재 일본 화단에서 한국 화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 김태신이 있다.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는다고 했던가. 어머니를 늘 가까이할 수 없었지만 운수납자처럼 떠돌며 한국의 유명 사찰과 명산을 다 돌아다녀보고 한국의 산을 화폭에 담는 것은 물론,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고승들을 만나 정신세계를 넓혀가는, 그리 흔치 않은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용운, 최영환, 임환경 등 독립운동가를 만나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굳혀갔고, 알게 모르게 독립운동 자금 운반책 노릇도 했다. 이렇게 그는 일본인의 피와 한국인의 피를 한몸에 받은 죄 아닌 죄로 ‘맷돌 하나를 가슴에 얹어놓고 사는 듯한 기분’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간을 견뎌냈다. 그렇다고 일본 오다 가문에서 장손인 일당스님의 위치가 확고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한국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장손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다. 더구나 오다 가문에서 일당스님을 장손으로 인정하면 ‘재산 상속인’으로 인정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친척들은 그를 배척해내기 바빴다. “연말이 되면 일본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어요. 어느 해 사촌형님으로부터 정종 한병이 선물로 들어와서 밤에 그 술을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안개가 자욱해요. 그래서 ‘프랑스에만 안개가 많은 줄 알았더니 일본도 안개가 많네’하니까 ‘오늘 날씨가 얼마나 화창한데요’ 하면서 가족들이 깜짝 놀라요.” 부랴부랴 도쿄대학병원에 달려간 일당스님은 ‘독극물에 의한 실명이 우려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그리기도

“사촌형이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술에 독극물을 넣었던 겁니다. 만일 술을 한병 다 마셨으면 죽었겠죠. 그일로 1년6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그 뒤에도 여덟번이나 수술을 했어요.” 이 사건 이후 일당스님은 생명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다 가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서 도장까지 찍어준 상태다. 그런데 의외로 스님의 출가는 속세의 시간으로 따져보면 ‘늦깎이’ 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뉴욕 원각사에서 관응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을 무렵이 67세였으니 말이다. “어머니 일엽스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었고, 어머니와 좀더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일까. 희한하게도 일당스님이 출가한 후 그에게는 믿지 못할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암자에서 밤 늦게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든 채 잠이 들면, “태신아, 일어나” 하고 외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는 것. 장소를 옮겨도 마찬가지로 매일 새벽 일당스님은 일엽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의문의 일이기는 하지만 일당스님은 그렇게라도 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한편, 일당 스님은 불가의 연을 맺기 전 일본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음악교사 김청인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김청인 여사 외에도 일당스님의 따뜻한 성품과 미술적인 재능에 반한 여성은 많았다. 이 가운데 2명의 여성은 일당스님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일당스님은 해방 직후 김일성 주석 초상화를 그린 이력 때문에 한동안 조총련계 간첩으로 의심받아 작품활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그것말고는 출가한 이후에도 줄곧 붓을 놓지 않았다. 현재 일당스님은 직지사 중암에 자그마한 화실을 마련해놓고 주로 ‘고태법’을 이용한 신비로운 느낌의 ‘석채화’를 그린다. 고구려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한 천연색을 뽑아내기 위해 직접 돌가루를 빻아 그림을 그려서일까. 일당스님의 그림에서는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느낌이 은근히 배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산을 그리기로 결심했었어요. 나에게 산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을 그리고, 산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잊고 싶었거든요. 산을 그린다는 것은 곧 어머니와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위로와 휴식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일당스님의 어머니 일엽스님은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 된다’며 출가와 동시에 절필했지만, 붓으로 표현하는 일당스님의 ‘사모곡’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글·박윤희 자유기고가. 사진·박해윤 기자]

 

출처 : 도솔산장
글쓴이 : 솔아솔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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