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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사 김정희 고택(故宅)

kk고상 2009. 4. 28. 14:29

추사 김정희 고택(故宅)

 

 김정희(金正喜)는  호(號)가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 등이며, 우리에게는 호(號)로 부르는 것이 더 친숙하고, 멋스럽다. 이 외의 다른 호로는 예당(禮堂), 시암(詩唵), 과파(果坡), 담연재(覃硏齋),

보담재(寶覃齋), 노과(老果) 등이 있다.

 

추사는 1786년 6월3일, 이 곳 충남 예산에서 부친인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 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이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英祖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써, 현재는 23칸만 남아 있다.

 

추사는 이 곳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서기 전까지, 여기서 성장하였으며, 말년에는

生父인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다,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철종 7년)에 작고하였다. 벼슬하면서 3번의 유배 생활을 한다. 고금도(古今島), 제주도, 함경도 북청 등

총 12년의 귀양살이이었다.

 

 

秋史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英祖의 장녀 화순옹주와 결혼한 후, 서울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김한신은 집이 너무 크다고 임금에 상소하여 이 곳 고향으로 집을 뜯어 그대로 옮겼다. ( 다른 얘기도 있다. 당시 서울의 士大夫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충청도지역에 전답 등을 별도로 확보하여, 생계의 근거로 삼거나, 여가를 보냈다. 그래서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지만... 김한신의 경우는 이 후자의 사례이다. 英祖가 사위에게 고향 땅을 下賜하였다는 얘기도 있고...이 故宅을 건립할 때, 각 지방의 수령들이 1칸 씩 맡아 총53칸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金興經)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英祖의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38세에 죽었다. 김한신은 그 자체의 학문과 인품으로 크게 벼슬할 수 있었으나, 왕실 사위의 관직 금지라는 제도로 인하여, 학문과 문학에 심취하였다. 그러한 제도적 굴레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는 특히 더욱 處身에 조심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부인 화순옹주는 김한신이 죽은 후 스스로 모든 음식을 끊어, 14일만에 김한신의 뒤를 따른다.  이곳 秋史의 묘에서 약 300m 지나서,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 묘가 있다.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바깥 소슬대문을 들어 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 집이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주택 개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충청도 양반"의 근거는?  추사 김정희는 충청도 양반이었다.

 

구한말의 지식인 황현(黃玹. 1855~1910)은 " 평양은 기생(妓生) 피해가 크고, 충청도는 양반(良班) 피해가 크고, 전주는 아전 (衙前. 하급관리) 피해가 크다. " 라고 지적하였듯이 충청도는 양반이 너무 많아서 양반의 피해 云云할 정도이었다.  그렇다면 왜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으며, 충청도가 양반 살기에 적당하였던 인문지리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1751년 (영조27)에 저술된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는 다음과 같이 충청도를 설명하고 있다.

 

남쪽의 半은 차령산맥(車嶺山脈)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半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物産)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지만, 산천이 평평하고 에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代를 서울에 살면서 이곳 충청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었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하고, 그 중에서도 내포(來浦)가 제일 좋은 곳이다. 가야산 앞뒤에 열개의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地勢)가 한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즉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우선 정치권력이 집중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교통의 이점과 山川이 평평하고 예쁘다는 風水的인 장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추사고택이 자리잡은 이 곳 내포(來浦)라는 지역이 난리를 겪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금과 생선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忠淸道에는 위압적인 山이 거의 없고,돌산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野山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흔히 충청도 산세(山勢)의 부드러움을 표현할 때 "개떡을 엎어 놓은 것 같다" 거나 "솜이불을 덮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그만큼 야트막한 둔덕같은 山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秋史故宅이 자리잡고 있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주변의 山勢 역시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은 충청도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고택은 솜이불 같이 포근한 기운을 풍기는 야트막한 둔덕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변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속살같은 이불뿐이요,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山이 전혀 없다. 살기(殺氣)가 없다는 의미이다.

 

 

추사고택 곳곳에 걸려 있는 추사의 글씨들... 그는 경학(經學), 금석학, 불교학 그리고 詩와 그림에 뛰어났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었지만, 특히 글씨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면 추사체(秋史體)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유흥준의 완당일지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간략히 정리하여 보면....

 

어릴때부터 뛰어난 글씨 솜씨로 사람들의 극찬을 받았고,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었다. 중국 연경에서 옹방강(翁方綱) 등의 대가와 접촉하고 수많은 진적(眞跡)을 감상함으로써 글씨에 대한 안목은 더욱 향상되었다.

 

국내의 書道에 대하여 " 구서(舊書)의 어떠한 것도 모르고, 그후에 자기류의 서법으로 널리 자랑하며 가(家)마다 진체(晉體)요, 호(戶)마다 왕희지(王羲之)라. " 하여 철저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원래 명나라의 동기창(董基昌)의 書法을 따르고 있었는데, 연경에 가서 농후하고 기골이 강한 옹방강(翁方綱)의 서체를 본받게 되었다.  이후 옹방강이 숭상하는 송(宋)의 소식(蘇軾)의 서체를 따르게 되었고, 훗날 해서(偕書)의 모범이 되었던 당(唐)의 구양순(歐陽詢)의 서법까지 익히게 되었다. 더욱 나아가 한예(漢隸)의 서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예서를 익히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흉?(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隸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고아하고 청고(淸高)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 낼 수 없다...라고 하여 예서(隸書)를 書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당대의 학자들은 추사체에 대하여 "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潮水)처럼 보인다 " 라고 평하였다.

 

 

난방용 부뚜막만 있고, 밥 짓는 부엌은 따로 있다. 王室 가족에 대한 예의이란다.

 

 

 

안채...안채에는 부엌도 없고, 나무 한그루 자랄 수 없게 만들었단다. 집 모양이 "ㅁ"형태로 그 안에 나무(木)이 자라면 곤혹스러울 곤(困)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곳 안채에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와 그의 부인, 英祖의 둘째딸 화순옹주가 시집와 살았다.

 

 

 

안채에 세한도(歲寒圖)의 영인본이 걸려 있다. 제자 이상적에게 보내는 글과 그림이다. 그 내용은.....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은 보아라..로 시작한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작년에도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올해에도 또 우경(藕莖)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 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리 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리니...

 

세상의 도도한 人心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같이 마음과 힘을 들였거늘, 이것들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갖다 주다니...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런 풍조 속에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대는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一年中에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사철을 통하여 세한(歲寒)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푸르지만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 주거늘...나의 곤경 이전에는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 부터 칭찬을 들을 만 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세한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한나라 시경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때 ,급암과 정당시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興하고 衰하였으며,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 붙인 것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 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 노인 씀.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1844년 김정희 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동안에 제자인 우선,이상적 (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들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師弟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歲寒松)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김정희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

 

이상적은 추사보다 18세 年下의 中人이었다. 秋史는 다가오는 새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위주로 제자를 길러냈으니 그 門下에는 진보적 양반 자제는 물론 中人과 庶孼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12번이나 중국에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文士들과 교류를 깊이 하였다.그는 특히 詩로 명성을 크게 얻어 1847년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에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른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을래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데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시문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이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멋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은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이 되어 北京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정초에 淸나라의 文人 16인과 같이 한 자리에서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격하여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은 이것을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제주도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었다.

 

1年이 지나, 세한도를 다시 대하게 된 秋史의 휑한 가슴에 저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적은 나중에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들고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겼다.

 

지기평생존수묵  (知己平生存水墨)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이었네

소심난우세한송  (素心蘭又歲寒松)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스승 김정희가 그려준 세한도는 제자 이상적의 평생이 가치있는 것이었슴을 대변해 줄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다.  세한도는 그려진 연유에도 곡절이 있었거니와, 그려진 이후에도 천하를 유랑한 行路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애초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중국 연경(燕京)까지 다녀왔던 이 작품은 다시 제주도 스승에게 보인 후에 물론 이상적의 소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이란 사람의 소장품이 된 것을, 그의 아들 김준학(金準學)이 물려받아 2代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이르러,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이었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카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현해탄을 건너고 말았다.

 

그러나 종전(終戰) 직전에 우리나라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일본 동경으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비오듯 퍼붓는 폭격기의 공습 위험을 무릎쓰고, 석달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조국땅을 밟게 되었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하고 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 많은 자료들은 결국 美軍의 폭격을 피하지 못하여 대부분 타버리고 말았다.  세한도는 그야말로 九死一生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었다.

 

그러나 세한도의 주인은 또 다시 바뀌게 된다. 죽음을 무릎쓰고 갖은 고생 끝에 되 찾아온 세한도..그 후 너무나 어이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학회 할동, 진도중학교 설립..등 사회활동을 하다가 드디어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예술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資金이 쪼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書畵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 만큼,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저당잡히며 돈을 빌려 쓰기 시작하였다.

 

개성 상인 이근태(李根泰), 그는 信用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 왔고, 그의 손에는 김정희의 세한도, 단원(檀園)의 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齊色圖) 등이 들려 있었는데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서화들이었다.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 있던터라,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서까지 그 물건을 저당잡아 주었다. 그러나 손재형은 첫달부터 利子를 가져오지 않고, 정치활동에만 집착하였다. 이근태는 결국 자기 돈으로 이자를 물어가며, 결국에는 남의 돈을 빌려 남의 이자를 갚아야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근태 역시 古書畵를  좋아해  김정희, 대원군,정선, 심사정 등 거장들의 여러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그 그림들 역시 利子를 물기 위하여 모두 팔려 나갔다.

 

마침내 이근태 역시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이 없자,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하였다. 세한도 역시 개성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소장하고 있다. 1974년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國寶 제180호 지정되었다.

 

 

안채 뒷편에 사당으로 오르는 조그만 길이 있다.  

 

 

 

  

출처 :非 山 非 野 원문보기 글쓴이 :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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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okok박용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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