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소시집
가을 속으로
금강산도 못 갔는데
곡식 익어가는 얼굴만 보러가고 싶다
백두산도 못 갔는데
가을 색깔 보러 들판만 가고 싶다
익어가는 가을보다 더 좋은 꽃은 없다
머리 숙인 곡식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없다
결실보다 더 빛나는 별은 없다
가을보다 더 빛나는 햇살은 없다
모든 곡식이 머리 숙여 감사해 한다
머리 숙여 익는 가을은 아름답다
사람이니까 머리 숙여 익지 못해 슬프다
사람이니까 머리 숙이면 죄인이라 슬프다
논바닥 어둠의 길 휘젓는 우렁이가 부럽다
가을잎새 베어 물며 날뛰는 메뚜기가 부럽다
바람난 나를 받아줄 가을 없어 슬프다
넘치는 가을에 밥 한 끼
공짜로 먹을 수 없어 슬프다
들보다 산이 빛나지 못해 슬프다